sin001
 
 
 
     
 

내 / 용 / 보 / 기
글작성자
   2010-04-02 12:30:15 | 조회 : 4196
제        목   화랑도 [花郞徒]
국선도(國仙徒)·풍월도(風月徒)·원화도(源花徒)·풍류도(風流徒)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무리를 뽑아서 그들에게 효제(孝悌)와 충신을 가르쳐 나라를 다스리는 데 대요(大要)를 삼는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처음에 군신(君臣)이 인재를 알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어 사람들을 끼리끼리 모으고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 거용(擧用)하려 하였다’ 하고, 이들은 ‘서로 도의를 닦고, 서로 가악(歌樂)으로 즐겁게 하며, 명산과 대천(大川)을 찾아 멀리 가보지 아니한 곳이 없으며, 이로 인하여 그들 중에 나쁘고, 나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어, 그 중의 착한 자를 가리어 조정에 추천하게 되었다’고 그 설치목적과 수양과정을 적고 있다.

이로써 화랑도의 설치는 인물을 양성하여 그 가운데 인재를 가려서 국가에 등용함을 목적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소기(所期)의 성과에 대해 《삼국사기》는 ‘현좌(賢佐:賢相)와 충신이 이로부터 솟아나고, 양장(良將)과 용졸(勇卒)이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고 하였다. 그 설치연대에 대해서 《삼국사기》에는 576년(진흥왕 37)이라 하였으나, 562년에 이미 화랑 사다함(斯多含)이 대야성(大耶城:高靈)을 공격하여 큰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음으로 보아 신라는 이때에 이르러 이전부터 있었던 미비된 상태의 청소년 집단이던 화랑도를 국가조직 속에 편입시켜 무사단의 성격으로 강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화랑도는 그 조직과 수양과정을 통하여
① 위로는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는 벗을 위하여 죽으며,
② 대의(大義)를 존중하여 의에 어그러지는 일은 죽음으로써 항거하고,
③ 병석에서 죽는 것을 꺼리고 국가를 위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함을 찬양하며,
④ 오직 전진이 있을 뿐, 물러섬을 부끄럽게 여겨, 적에 패하면 자결할지언정 포로가 됨을 수치로 아는 등 독특한 기질과 기풍을 연마, 함양하였다.
또한 원광법사(圓光法師)가 귀산(貴山)·취항(箒項) 두 화랑에게 주었다는
세속오계(世俗五戒:事君以忠·事親以孝·交友以信·臨戰無退·殺生有擇)가
화랑의 정신적 기저(基底)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화랑의 기풍은 당시 신라의 종교적 정신세계가 받쳐주었다. 그것은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 서문(鸞郞碑序文)에 나타나, 그는 ‘우리 나라에는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다. 이를 풍류(風流)라 하는데, 이는 삼교(三敎:儒敎·仙敎·佛敎)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중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하였다. 그들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이는 공자(孔子)의 가르침이며(儒敎), 또한 모든 일을 거리낌없이 처리하고, 말을 아니하면서 일을 실행하는 것은 노자(老子)의 가르침이며(仙敎), 모든 악한 일을 행하지 않고, 착한 행실만 신봉하여 행하는 것은 석가(釋迦)의 교화(佛敎)’라 하였다. 실상 화랑도에게 일종의 수호신같이 숭배되었던 미륵존(彌勒尊)이나, 낭도 중에 승려가 많았으며, 승려가 화랑의 집회에 관계하였다는 점 등은 화랑도와 불교와의 관련을 말하여주는 것이다.



세속오계  [世俗五戒]  

원광이 수(隋)나라에서 구법(求法)하고 귀국한 후,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찾아가
일생을 두고 경계할 금언을 청하자, 원광이 이 오계를 주었다고 한다.

즉, 사군이충(事君以忠: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긴다)
·사친이효(事親以孝: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긴다)
·교우이신(交友以信:믿음으로써 벗을 사귄다)
·임전무퇴(臨戰無退: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남이 없다)
·살생유택(殺生有擇:산 것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다)이다.

이는 뒤에 화랑도의 신조가 되어 화랑도가 크게 발전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이룩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전글 |  애기들에게 죽염을 먹여 보세요   2010/06/03 
 다음글 |  노나무와 벌나무?? [1] 권태진   2010/02/28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 skin by daerew